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차시 1세 (문단 편집) ==== 보헤미아 전쟁 ==== 마차시는 재위 초기에 오스만 제국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서방의 도움이 제대로 오지 않는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인 짓이라고 판단하고 전쟁을 중단했다. 그 대신, 그는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은 후스파 지도자이자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노렸다. 1468년 초 이르지의 아들 빅토르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에게 [[독일왕]]으로 추대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차시는 3월 31일 보헤미아에 선전포고하고 오스트리아로 진군해 보헤미아군을 몰아낸 뒤 모라바와 슬레스코를 침공했다. 1468년 5월 테베비차 포위전을 치르다가 부상을 입었고, 1469년 2월 크루딤에서 변장한 채 적진을 정찰하던 중 체포되었지만, 자신이 보헤미아에 사는 평범한 말 사육자라고 속이고 겨우 빠져나갔다. 이후 전세가 악화되면서 헝가리군과 보헤미아 내 가톨릭 부대가 빌레모프에서 이르지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이르지와 어느 오두막에서 만나 협상을 벌인 끝에, 온건한 후스파와 교황청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1469년 4월에 [[올로모우츠]]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프라하 교구장에 가톨릭 대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포함한 교황 특사단의 요구를 전달했다. 5월 3일,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는 올로모우츠에서 마차시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다. [[모라비아 변경백국|모라바]], [[슐레지엔|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를 받아들였지만, 보헤미아 본토는 이르지를 계속 지지했다. 일부 귀족들은 [[폴란드 왕국]]의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울라슬로 2세|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가 이르지의 뒤를 이을 권리를 인정했다. 1469년 중순, 마차시는 이르지가 이끄는 군대를 슬레스코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11월 2일 우에르슈브로드에서 급습을 받아 패주했다. 이후 헝가리로 철수한 그는 의회를 열지 않은 채 특별세 부과를 선포했고, 이로 인해 헝가리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1470년 2월 11일, 마차시는 빈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이르지와의 전쟁 비용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를 공격하려는 오스만 제국군이 슬라보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한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한 달 이상의 협상에도 별다른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헝가리로 돌아갔다. 이후 귀족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져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1470년 11월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그에게 특별세를 부과할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한 개의 포르타(porta) 당 납부해야 할 모든 세금의 합계가 1 플로린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했으며, 보헤미아 전쟁을 지속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리하여 전쟁을 지속하기가 곤란해진 마차시는 보헤미아로의 공세를 중단했다. 1471년 3월 22일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5월 27일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블라디슬라프로 추대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의회는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1471년 마차시가 모라바로 가서 보헤미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차남 카지미에시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급보를 접했다. 이 음모는 비테즈 야노시 대주교와 그의 조카 파노니우스 야노시가 가톨릭 신자인 블라디슬라프와의 전쟁을 막고자 벌인 것이었다. 마차시는 즉시 헝가리로 돌아온 뒤 의회를 소집하고 "앞으로는 귀족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으며 매년 의회를 소집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이에 귀족들은 만족했고, 9월 21일 50명 가량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71년 10월 2일, 카지미에시 왕자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는 판노니우스 야노시의 지원에 힘입어 [[니트라|니트러]]를 공략했지만, 오직 로스고니 야노시와 페레니 미클라시만 가담했을 뿐, 다른 귀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시가 즉각 반격을 가해오자, 카지미에시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판노니우스 야노시는 헝가리에서 도주하던 중 사망헀고, 비테츠 야노시 대주교는 교구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얼마 후 비테츠 야노시가 사망하자, 마차시는 베켄슬로르 야노시를 에스테르곰의 새 대주교로 선임했다. 1472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반기를 든 오스트리아 귀족들을 지원했다. 1473년 마차시, 카지미에시 4세, 블라디슬라프는 평화 협상에 들어갔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는 수 십개의 작은 공국들로 구성된 슬레스코 정부를 통합하고 총사령관을 세우려 했지만, 슬레스코 귀족들은 그가 내세운 리그니츠 공작 프리드리히 1세를 총사령관으로 받들기를 거부했다. 1474년 2월,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사이에 3년간의 휴전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1474년 3월 블라디슬라프는 프리드리히 3세,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를 재차 적대했다.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그해 10월에 슬레스코를 침공하여 [[브로츠와프|브라티슬라프]]에 있던 마차시를 포위했으나, 마차시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 공급에 차질을 겪은 끝에 퇴각했다. 그 후 슬레스코 귀족들은 마차시가 새로운 총사령관 후보로 내세운 서포여이 이슈트반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모라바 귀족들도 치보르 토바초프스키를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토바초프스키는 블라디슬라프 국왕의 친척이었지만, 마차시는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1476년, 글로가우 공국의 공작 하인리히 11세가 사망했고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가 공국을 상속받았다.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에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글로가우를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그러나 마차시 1세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11세의 조카 요한 2세가 글로가우로 쳐들어와서 바르바라를 몰아냈다. 블라디슬라프는 글로가우를 탈환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기로 했다. 교황 특사 발다사레 데 피사로부터 마차시의 영토를 침범한다면 파문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1476년 12월 5일 또다시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고 마차시와 전쟁을 단행했다. 그 후 슬레스코와 모라바 연합과의 전쟁에서 고전하던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에 평화 협정을 맺차고 요청했다. 양자간의 협상은 수 년간 진행되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1478년 1월 15일, 발다사레 데 피사는 마차시와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블라디슬라프와 추종자들을 파문하자 재협상이 진전되어 1478년 3월 28일에 최종적으로 합의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모두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보헤미아 본토는 블라디슬라프의 권위를 인정하고 모라바와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7월 21일 올로모우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평화 협약을 비준했다. 1477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3세는 블라디슬라프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공인했다. 이틀 후, 마차시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했다. 블라디슬라프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지만, 적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자 7월 말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프리드리히 3세는 빈에서 헝가리군에게 포위되자 12월 1일 마차시 역시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